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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서울 역사, 세계 도시 이론

한국에서 철도공사의 역사

한국에서 철도공사의 역사

한국에서 철도공사의 역사
한국에서 철도공사의 역사

우리나라의 근대화라는 것도 과거 각 지역에 행정 중심지들이 있는데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경상도', '전라도'라는 말 자체가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 이게 전통시대에 한국 각 지역의 중심지였죠. 그런데 이것이 근대적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여러분이 생각해보시면 아시겠지만, '경상도' 하면 지금은 대구와 부산이지 않습니까? '전라도' 하면 전주와 광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통시대의 중심도시들이 그대로 한국의 근대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계승이 되지 않았죠. 그 영향을 따질 때 우선 첫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게 일본의 식민지의 영향인데요. 우리나라에 처음 철도가 놓이게 된 것은 조선말 고종 시기죠. 그때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이 처음 부설됩니다. 그렇지만 한반도 전체를 잇는 철도망이 만들어진 것은 일본이 들어오면서부터고요. 우리나라의 제일 간선철도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경부선과 경의선, 서울에서 부산 또 서울에서 신의주를 잇는 길은 굉장히 우리로서는 참 부끄러운 역사지만, 일본이 1904년에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사 용도로 아주 속성으로 부설했습니다.

철도의 초창기 용도

사실 철도는 초창기에 굉장히 군사 전략적인 용도로 많이 쓰였고요. 물론 전쟁이 끝나고 평화 시기가 오게 되면 상업이나 문화적인 용도로 많이 쓰이게 됩니다만, 초창기에는 굉장히 전략적인 용도로 쓰였습니다. 군대가 철도가 놓였을 때와 없을 때의 전략적인 차이는 어마어마한 거죠. 과거에 예를 들면 배를 타고 이동해서 일주일이나 걸려서 군대가 이동할 수 있었다면, 이제 기차가 생기게 되면 바로 하루 이틀 만에 일기에 사단 병력이 바로 종착역에 나타날 수가 있는 거니까요. 철도가 지녔던 초창기의 전략적인 가치는 어마어마했던 것이죠. 그래서 러일전쟁 때 일본이 속성으로 부설한 것이 한국의 주요 간선철도망이 되었고요. 그게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 이어지면서 일본이 한반도에 종관 철도를 부설하게 됩니다. 그게 서울과 대전까지 잇는 중심으로 공통 선을 놓고 그게 영남 경부선, 호남선, 경원선, 함경선으로 가는 선, 경의선 이렇게 엑스자 모양의 종관 철도가 부설되는데요. 그 과정이 결국 한국에 주요 근대도시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종관 철도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도시들은 한국 전통시대의 도시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이 1910년에 우리나라를 완전히 강제 병합하고 나서 4년 뒤인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을 확정해서 선포를 하는데요. 그때 12개의 부를 설치합니다. 이때 부라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시(市)에 해당하는데요. 그러니까 한반도 주요 각 지역의 개발 거점으로서 12개의 시를 지정한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12개 중에 과거 조선시대부터 각 지역의 중요한 행정 거점지였던 도시는 딱 3군데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 철도의 역사

서울, 평양, 대구. 이 3개를 제외한 나머지 9개 도시는 전부 다 개항 이후 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된 항구도시이자 신도시인 것이죠. 사실 일본이 철도를 통해서 근대도시망을 한국에 처음 만들었는데, 이건 결국 한국 전통시대의 행정 지역망을 철저하게 부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식민지적인 도시화의 특징이었다고도 할 수 있고요. 사실 그러한 기본 골격이 짜인 것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고종황제 때도 한반도 전체를 잇는 철도망에 대한 논의는 나오는데 실행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기회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는 것인데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영남대로, 우리가 충주, 상주, 대구, 밀양 이렇게 잇는 길을 통해서 철도를 건설했다면, 이게 최단거리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던 부분이 있죠. 굉장히 난공사에 해당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 공사

강과 산을 뚫고 건너가야 되는 길이 어서요. 지금 경부선 철도는 대전까지 쭉 내려와서 가기 때문에 거리상 상당히 우회를 하는데, 이건 러일 전쟁기에 일본이 속성으로 부설하려다 보니까 공사의 편의성 면에서 조금 거리를 우회하더라도 공사를 빨리 할 수 있는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부설했다는 걸 우리가 알 수 있고요. 그다음에 가급적 조선인들의 지방행정 도시들은 피했던 측면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의도가 그랬던 면도 있고, 당시 조선인들 자체가 철도가 들어오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그런 면도 일부 있습니다. 어쨌건 그래서 이런 철도망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고요. 이거는 경성의 도시 구조에도 나중에 영향을 미칩니다. 즉, 일제시대에일제강점기에 서울을 부르는 이름이 경성인데요. 경성에서 처음 철도 역사가 용산, 지금의 서울역에 해당하는 남대문역, 서대문역 이렇게 구성이 되어 있는데요. 이 노선이 일종의 서울을 서쪽으로 우회해서 남쪽으로 나가게 돼 있죠. 지금 우리가 경부선 철도를 보면 그러한데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서울 정남향에는 관악산이 있어서 이걸 뚫고 지나가기 어렵기 때문에 그걸 우회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고요. 경인선이 제일 먼저 부설됐기 때문에 그것과 선로를 공유하다 보니까 거기서부터 돌아서 관악산을 우회해서 나아가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일제강점기에 첫 서울 도시 구조가 사대문 안과 용산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다가 이게 나중에 확장되는 방식이 동북쪽으로는 청량리 쪽, 서남쪽으로 영등포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서울이 팽창하게 되거든요. 1936년에 대경성 계획이라고 해서 경성시가지가 대폭 확장이 됐는데, 그때 이렇게 일종의 선형으로 확장이 되는 것도 바로 이 철로에 따라서 확장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국의 근대 초기, 도시화에 해당하는 식민지 시기가 이와 같이 철도교통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는 걸 알 수 있는데요. 해방 이후에는 이게 어떻게 되었을까요? 해방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도로교통, 자동차 교통 중심으로 도시가 크게 바뀌게 되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도시 네트워크 서울의 시가지 형태도 과거 근대 초기 혹은 식민지 시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변모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