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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서울 역사, 세계 도시 이론

쓰레기 문제를 통해 본 서울의 초거대도시화

쓰레기 문제를 통해 본 서울의 초거 대도시화

쓰레기 문제를 통해 본 서울의 초거 대도시화
쓰레기 문제를 통해 본 서울의 초거 대도시화

서울 사람들의 소비 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은 또 거꾸로 말하면 서울에 그만큼 상품이 들어와야 되는 거지만 같은 맥락에서 그만큼 많은 쓰레기가 서울에서 배출되는 변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울이 초거대 도시화되고,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소비 수준이 올라간다는 것은 쓰레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요. 우리가 서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대표적인 쓰레기 처리장 하면 많은 분이 난지도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난지도가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지금은 하늘공원, 노을공원 이렇게 상암동 일대 재개발과 함께 완전 친환경적인 녹지공원으로 변신해 있죠. 사실은 한때 서울의 쓰레기 산으로 알려져 있던 곳이 이와 같이 서울을 대표하는, 혹은 한국을 대표하는 친환경 공원으로 뒤바뀐 현상. 이것만큼 서울이 산업 도시에서 어떻게 보면 탈산업도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아주 대표적인 아이콘. 이런 아이콘을 들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난지도와 쓰레기

그렇다면 그 난지도 이전에는 어떠했고, 지금 난지도 이후에는 서울의 쓰레기가 어떻게 배출되고 있을까에 대해서 같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쓰레기라고 불리는 것이 요즘은 워낙 쓰레기가 많습니다만, 옛날에는 별로 쓰레기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제일 중요한 쓰레기라고 처리해야 될 부분이 무엇이냐 하면 분뇨거든요. 똥, 오줌입니다. 이 똥, 오줌 처리의 문제가 옛날 조선시대의 한양에서 분뇨 처리를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시면 이건 사실 예전 농촌에서의, 기억하고 계신 분들은 아주 쉽게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대부분 오물을 분뇨를 망태에 담아서 논밭에 뿌렸죠. 이것이 토질을 비옥하게 하는 중요한 양분이 되니까요. 그래서 지난번에 한국의 논농사니, 유럽의 삼포작 농법이니 이런 것 말씀드렸습니다만 결국 농사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햇볕, 물, 토지에 얼마나 양분을 품고 있는가라는 것이 결국 농사를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분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고, 그 전통시대에 제일 중요한 거름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 분뇨인 것이죠. 그래서 한양이라는 도시에서 나오는 배출되는 분뇨는 과거에는 사실 돈을 주고 사 갔다고 하죠. 주변 지역에 다 분뇨로, 거름으로 쓰였던 것이고요.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양의 중세 도시사에서 보면 예를 들면 문화사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서양 여성들에게서 하이힐이나 향수가 언제부터 어떻게 나타나기 시작했는가 이야기할 때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이 하이힐이 사실 똥, 오줌으로 범벅돼 있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여성들이 거기에 젖지 않으려고 처음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하죠.

서양 중세 분뇨 처리의 어려움

서양 중세 같은 경우에도 성곽도시 안에 점점 인구가 늘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분뇨 처리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요. 처음에는 성곽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가 똥, 오줌을 버리는 중요한 배출소였고, 비가 오면 해자가 씻겨 내려가니까요. 그리고 바깥 지역에 늘 분뇨를 거름으로 쓰고, 그래서 우리가 흔히 굉장히 로맨틱하게 중세의 성곽도시들의 풍경을 그립니다만 실제로 우리가 그 당시에 시간 이동을 해서 가 본다면 굉장히 많은 악취들이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이야기고요. 우리가 흔히 아름다운 전원풍경에 드라이브를 하다가 바람을 쐬려고 창을 내려 보면 거기에서 분뇨 냄새를 맡고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하는데 사실 그런 냄새들이 특히 도시 안에는 아주 엄청나게 그런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고 봐야 되는 거죠. 그리고 상하수도 설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잘 씻지도 못하고 하니까 늘 몸에서도 굉장히 많은 악취가 났던 것이 사실이고, 그런 것을 감추기 위해서 향수가 발전하고 이랬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조선시대 분뇨 처리의 어려움

우리 조선의 경우에는 상수도도 일정한 규모에서는 비교적 물도 풍부했습니다. 예를 들면 경상부 안에 인구가 10만, 20만 정도까지 되는 범위에서는 상수도 물을 우물이나 냇물을 이용해서 활용하고 똥, 오줌을 자연적으로 똥 망태로 주변에 거름으로 공급한다거나 혹은 개천을 통해서 배출한다거나 이렇게 했을 때 큰 무리 없이, 지하수에 큰 오염이나 이런 것 없이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한 범위에서 생태 균형이 유지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여기도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상하수도 시설이 없다면 그 분뇨가 지하수를 오염시켜서 상수도원 우물을 오염시킬 수도 있고요.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겠죠.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19세기 북창 물장수라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북방에서 내려와서 서울에서 맑은 물을 팔아먹는 사람들이죠. 상품으로 물을, 오늘날 같이 생수를 상류층 양반들에게 돈을 받고 파는 업종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지역 북창 지역 사람들이 독점했기 때문에 북창 물장수가 유명합니다만. 그런 게 일종의 서울이 조선 후기에 경강 상업 이후에 도시가 팽창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그런 상하수도 설비가 없는 상황에서 이 상수도가 오염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현상으로 확인할 수 있고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어쨌든 서울은 지금 우리가 청계천이라고 부르는, 맑을 청 자 청계천이라는 말을 예전에는 쓰지 않았고요. 조선시대에는 그냥 개천이라고 썼고, 이게 일종의 서울의 하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4대 문 안에 여러 개울물이 모여서 청계천을 거쳐서 동쪽으로 흘러서 한강으로 합류되는 것이었는데요. 이게 자연스러운 하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가 너무 쓰레기가 많이 쌓이게 되면 이게 물길이 막히겠죠. 그런데 늘 우리나라 날씨는 여름에 비가 많이 오니까 한 번씩 비가 오면 이게 씻겨 내려가고 이렇게 됐는데 조선 후기되면 이게 굉장히 물길을 막을 정도로 쓰레기나 분뇨가 많이 쌓이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이걸 정부에서 나서서 인위적으로 물길을 청소하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걸 준천이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18세기 영조 때 보면 준천 사라는 조직이 따로 만들어져서 정기적으로 청계천에 준천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 그 시기에 이르면 이미 서울에 상당히 많은 인구가 늘어나고 쓰레기가 그만큼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쓰레기나 분뇨를 유상으로 수거해서 처분하는, 그래서 수거 인구를 고용해서 쓰레기 수거가 정부에서 혹은 업체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한말 이후의 일입니다.

20세기 한성 위생회

20세기 초에 소위 한성 위생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지면서 오물 처리 체계, 그러니까 유상 수거 처분. 그리고 수거 인부를 고용하고 쓰레기 소각소를 운영하는 이런 방식이 1908년에 제예규칙이라는 게 만들어지는데 그것에 따라서 일괄적으로 진행되었고요. 그러다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1936년에 서울이 대경성이라는 형태로 확장되는데, 36년에 조선 오물 소제령이라는 게 제정이 되면서 오물처리를 아주 전국적으로 통일된 법에 의해서 운영을 하게 됩니다. 이게 식민지 시기이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쓰레기 처리가 산업화되어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까 20세기 초에 한성위생회 말씀드렸을 때 한성 위생회가 그러면 4대 문 안에 쓰레기를 수거해 가서 어디에서 처분했느냐 하면 동대문 바깥, 바로 앞에 있었고요. 그다음에 용산 만리창 지역, 지금 여의도 건너가는 서강대교 밑에 있는 밤섬. 이 세 곳에 분뇨 처분장을 두었고, 그밖에 광희문 밖의 신당리나 독립문 밖 아현리, 이런 몇 곳에 임시 처분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체로 분뇨는 그런 거름으로 쓰거나 했고, 오물 중에 쓰레기들은 그때부터 소각 방식을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쓰레기가 제대로 배출되거나 처분되지 않은 경우도 많았고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방치되어서 쌓여있는 곳도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