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고려시대 때부터 서울의 중요성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 강동구 쪽에 풍납토성, 몽촌토성 이런 유적들이 발굴되었죠. 거기가 백제 초기의 한성 백제시대의 위례성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해당하는 성의 흔적이라고 일반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백제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2000년 사가 나오는 거고요. 사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강동구 암사동에 선사시대 유적지가 있죠. 대략 기원전 5000년에서 4000년경에 형성된 신석기시대의 유적이라고 하는데요. 빗살무늬토기가 대량 발굴이 되고, 그 시대의 마을 유적들이 거기서 발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따지고 올라가면 굉장히 더 오래된 역사를 서울 인근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흔적을 볼 수 있고요. 그 위에 백제시대 마을의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어서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 역사는 더 오래되겠습니다만, 역사시대로만 따져도 초기 백제부터 거의 2000년 정도의 역사를 서울의 역사로 생각해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럼 그때는 서울이 한반도의 중심도시, 수도가 되지는 못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과거에 서울이 중심도시가 되지 못했던 이유
예를 들면 고려시대의 수도는 국내성, 장수왕 때 평양으로 남진정책을 쓰면서 고구려의 수도가 옮겨오게 되고,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권에 세력을 형성했고, 백제는 한성에서 시작했는데 결국 나중에는 부여, 공주 이렇게 밑으로 내려오게 되죠. 사실 그렇게 삼국시대에는 서로 삼국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세 세력권 간의 경계지점이 지금의 서울 지역이었다고 볼 수가 있겠죠. 그래서 삼국시대사에 대해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한강유역을 지배하는 자가 삼한을 지배한다. '라고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고구려, 백제, 신라 어느 나라든 가장 전성기 때, 한반도를 지배하는 패권국가가 되었을 때는 서울 유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아까 백제가 가장 왕성할 때 한강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점점 세력이 축소되면서 밑으로 쫓겨 내려온다고 볼 수 있고요. 거꾸로 신라가 진흥왕 때 가장 전성기였다고 할 때 보시면 진흥왕 순수비가 북한산 정상에 세워져 있죠. 그런 것을 증명하는 자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삼국시대에는 삼국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울이 어느 한 나라의 수도가 되기는 어려웠지만, 군사적, 전략적으로는 굉장히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요.
고려시대의 서울의 역사
그다음 고려시대를 생각해보면 아시다시피 고려 왕건이 개경, 지금의 개성을 중심으로 한 호족 집단이 중심이 돼서 고려라는 왕조가 만들어지죠. 그래서 개성을 중심으로 한 고려가 만들어집니다만, 그때에도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한강유역은 남경으로 굉장히 중요시되었고, 사실 지금 저희도 남북한 교류로 개성공단이 만들어졌다가 취소되었다가 다시 재개하게 될 예정에 있습니다만, 서울과 굉장히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래서 서울은 고려시대에도 굉장히 중요한 통치에서의 지역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서울의 중심성이라는 것은 그럼 조선시대의 서울이 어떻게 이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질문이 될 텐데요. 아시다시피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에 소위 성리학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타락한 고려의 왕실 불교와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성리학을 중심으로, 신진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고 할 때 수도를 어느 정도 그 귀족들이 입지 하고 있는 지역에서 옮기는 것을 불가피했습니다.
고려시대에 서울을 수도로 선정한 이유
왜 그럼 서울 유역을 선정하게 되었을까? 그랬을 때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한양을 처음 전도할 때 풍수와 주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이니 외사산이니 얘기를 하면서 어떻게 궁궐터를 잡게 됐고 도성터를 잡게 되었는가를 풍수적인 관점에서 많이 설명을 하고요. 그래서 입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풍수가 굉장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다음에 도성 내부의 공간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는 중국에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도성의 설계 방식인 주례 고공기에 나오는 주례의 영향을, 주나라 때 일종의 도성을 만드는 방식을 주례라고 하는데요. 전 조후 시니 좌묘우사니 이런 말을 씁니다. 조정을 앞에 놓고 시장을 뒤에 설치한다든지 종묘사직을 각각 궁궐의 좌우에 배치한다든지 이런 내용들인데요. 기본적으로 그 원리가 어느 정도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흔히 여기서 간과하는 부분은 한강이라는 결정적인 중요한 수로를 중심에 놓고 이 서울의 입지가 결정되었다는 점이죠. 그래서 이 서울이 왜 한강변에 입지 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과거의 풍수나 주례보다는 농경시대에 서울이 한강이라는 수운을 이용해서 여러 물자를 수송하고 사람이 이동하는 데 있어서 물길이 결정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인데요.
과거 교통의 중심지였던 서울 한강 유역
특히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라는 인물이 원래 함경도 출신이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고려 말기에 북방 여진족, 남방에서의 왜구 등 전국적인 굉장히 국토를 유린하고 있는 전란의 상황에서 이성계가 전국 각지를 누비죠. 대단한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면서 일약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고, 그래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수 있는 국민적인 신망과 지지를 얻게 되는데요. 굉장히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던 이성계의 관점으로 국토를 눈으로 볼 때도 한강유역을 장악하는 것이 결국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아주 목덜미를 쥐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한강을 중심으로 한 서울 지역에 500년 왕조의 도읍지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뱃길을 거의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도로나 철도가 발달한 현대인들의 눈으로는 사실 그 전통시대의 교통망이 어땠을까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따가 제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남한강과 북한강 그리고 서해안으로 이어지는 해로를 이용하면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커버할 수 있는 광역의 교통망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과거에 지금 볼 수 있는 토목기술이 없었고, 도로가 없었고, 철도가 없었던 시절에 한국은 굉장히 산지가 많은 지역이라서 교통이 굉장히 열악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세 식량을 이동시키거나 사람들이 이동할 때 뱃길이 훨씬 더 유용한 수단이었던 것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한강유역은 굉장히 한반도 전체의 가장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한강을 중심으로 한양이 만들어졌고, 이 한양의 역사 500년이 끝나고 현대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서울은 중심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남북한이 분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역할이 제한적인 부분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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