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축산물 시장의 이동 역사
지금 우리 이미 반려동물 1000만 시대를 맞이하고 있어서 동물에 대한 감수성은 우리가 아주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 본다면 굉장히 크게 바뀌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조금 전에 LA갈비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 제대로 대중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고, 한국 사람들이 외식을 즐겨 하고 외식을 하면서 특히 고기를 즐겨 먹기 시작한 시기도 바로 이때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때부터 먹게 된 고기라는 것은 결국 살아있는 동물을 도살해서 먹어야 되는 건데 서울 사람들이 먹는 육고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공급되었을까, 라는 질문을 여러분 해보시면 혹시 답을 아시겠습니까? 아마 조금 연륜이 있으신 분들은 대체로 마장동 축산물 시장을 떠올리실 겁니다. 마장동에서 한동안 굉장히 도축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조선시대부터 육축이라고 해서 여섯 가지 가축인데요. 소, 말, 돼지, 양, 닭, 개를 우리가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대다수 백성은 고기를 구경하기는 어려웠고요. 아주 명절이나 한 번씩 이걸 먹을 텐데 닭이나 개는 가장 흔하게 우리가 마을에서, 혹은 집에서 일반적으로 잡아서 먹었습니다. 개 같은 경우는 풀어서 키우다가 여름철에, 대부분 주인 없는 개들이고요. 잡아서 영양보충으로 먹고. 단백질이 부족하니까, 고기를 먹을 기회가 워낙 없으니까 소위 보신탕 문화라는 게 한국에서 발전한 셈인데 반면 소나 말과 같은 큰 짐승들은 함부로 아무라 잡기에는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그걸 조선시대의 전문 도축업자인 백정이라는 천민 신분의 전문가들이 푸줏간에서, 혹은 도사라고 불리던 현방에서 도축을 전담으로 하게끔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도살에 대한 법 규제 신설
우리가 그런 가축을 잡는 모습은 70년대까지는 흔히 볼 수 있었던 모습이기도 해요. 시장에서도 닭은 그냥 바로 잡아서 통닭을 주고 했는데 요즘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한국의 치킨 문화가 전 세계에 유명할 정도로 우리가 치킨을 즐겨 먹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닭 잡는 모습은 보기 힘들죠. 우리가 닭이나 소나 돼지나 고기를 즐겨 먹게 되면서 오히려 그 고기를 살생하는 모습은 우리 생활 근처에서는 사라져버린 변화를 겪은 셈인데요. 그 고기를 생산하는 기능이 서울에서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통해서 제가 간단하게 서울의 도시의 확대 과정에서의 도살업의 위치 변화, 그리고 성격 변화를 한번 훑어보려고 합니다. 19세기 말에 민간에서 도살을 규제하기 위한 규칙이 포차규칙이라고 해서 처음 1896년에 공표되면서부터 갑오개혁기에 나온 일인데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제도적인 도살에 대한 법적인 규제가 생겨납니다.
도축장의 외곽화
이게 일본이 조선통감부 설치하면서 도살장 규칙이라든지 수육 판매 영업 단속 규제라든지 이런 게 만들어지면서 도축 장소, 도축 행위 이런 것을 쓰레기나 식품위생, 질병과 같은 공공위생 차원에서 함께 고려하게 되는데요. 1914년에 이르게 되면 경성부에서 아현동, 신설동. 동대문 밖, 서대문 밖 이 두 곳에 관용 도축장을 만들어서 운영합니다. 그 당시 아직 우리가 냉장이나 냉동 유통이 없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소비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도살해서 바로 공급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4대문 안에 그런 흉한 걸 둘 수 없으니까 4대문 바깥에 두었던 것이 아현동이나 신설동인 셈인데요. 그 뒤에서 현저동이나 이태원 이런 데 사설 도축장도 만들어지고 했고요. 그런데 이게 나중에 현저동에도 만들어져 있다가 20년대 넘어가면 숭인동, 동묘 근처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경성부립도축장이라는 것이 운영되는데요. 이게 그 당시 이미 경성부 내에서 2만 5000마리의 소를 가지고 와서 도살을 하는 상황에서 강원도나 주로 이런 데서 가축을 들여와서 거기에서 바로 소비지 근처인 숭인동 이런 데서 도축해서 성내에 공급하는 이런 방식으로 유통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게 1936년에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 경성부가 확대되면서 숭인동 일대가 경성부 내로 들어오니까 그 지역에 인구가 늘어나고 하면서 도축장을 유지하게 어렵게 되죠. 그래서 그걸 다시 외곽으로 보냅니다.
도축장들의 서울 밖으로의 이동
마련된 것이 왕십리 부근의 지금의 마장동으로 가야 된다고 새로운 가축시장과 도축장은 그리로 옮기자는 결론은 나는데 그 뒤에 바로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이렇게 하면서 제대로 이전할 비용이 없어서 일제시대에는 그게 시행이 못 됩니다. 그러다가 이게 일제강점기에 수립되었던 도축장의 마장동 이전 계획이 한국전쟁 지나서 61년도에야 이전이 되죠. 그래서 이때 서울시가 예산 들이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서 마장동 그 당시 청계천 변에 판잣집들이 대거 밀집해 있는 동네인데 거기를 철저해서 약 8000평 있는 부지에 가축시장을 준공하고 거기에 완전히 현대식, 그 당시 미국식의 공장형 도축장을 모델로 해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으로 도축공장을 새롭게 만들게 되죠.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라는 게 사실 미국의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20세기 초에 처음 도입한 시스템인데 자동차 부품 조립을 아주 자동적으로 신속하게 하기 위해서 만든 시스템이죠. 그런데 이것을 똑같이, 말하자면 자동차 부품 조립을 위해서 만든 컨베이어 벨트가 이 도축장에서는 현대식 도축 공장에서는 고기를 원재료 분해를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게 서울이 점점 시가지가 확대되고 고기 수요가 늘어나면서 7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 반대쪽 서울의 서남부 지역에도 도축 축산 시장 공급처가 하나 필요하다고 해서 74년도에 독산동에 도축장이 개장됩니다. 그다음에 86년도에는 동남권에 강남 개발이 본격화된 이후의 이야기죠.
80년대의 도축장들의 이전과 이후 변화
86년도 되면 강남권에 공급처가 필요해서 가락동, 오늘날의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내에 도축장이 개장되어서 80년대 후반 이후의 서울의 고기 공급 시장은 마장동, 독산동, 가락동 이렇게 삼원체제를 이루게 되죠. 그러다가 90년대 접어들게 되면 냉장, 냉동 설비를 갖춘 운송수단이 발달하면서 지방에서 도축을 해서 서울에 반입하는 것이 훨씬 더 양이 늘어나죠. 이게 무제한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서울 근교에서 도축하는 고기의 양은 점점 줄어들게 되면서 결국 나중에는 1998년에 마장동, 2002년 독산동, 2011년에 가락동 도축장이 폐쇄되고 지방으로 이전되고 이런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요즘은 한우는 워낙 비싸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우리가 소비하는 고기의 대부분은 해외에서 바다 건너서 수입한 냉동고기를 사 먹고 있습니다. 이게 글로벌 시대화가 되면서 글로벌 도시가 되었을 때 이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교통수단에 따른 서울의 4단계의 변화를 말씀드렸는데, 똑같은 맥락에서 그런 서울의 4단계 변화라는 것이 이와 같은 서울 사람들의 고기를 먹는 소비 문화의 공급처에서도 같은 방식의 변화가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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