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도시화의 서울과 인구의 팽창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근대 도시화의 첫 단추가 식민지 권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첫 단추부터 우리가 잘못 끼워진 부분이 극명히 있는데요. 1914년의 경성부가 성립됐을 때 이 경성부의 영역은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4대 문 안 지역에 용산지역을 더한 조금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죠. 이걸 그래서 땅콩형이라고도 하고 표주박형이라고도 표현하는데요.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우리가 일본이 굉장히 군사적인 강압을 통해서 한국을 점령했기 때문에 용산 지역에 일본 군 기지가 자리 잡게 되면서 일본이 군대 영역을 굉장히 중시했던 것이죠.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한성부의 외곽의 넓은 성저십리 지역은 배제시키고 용산에 일본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해서 그것과 4대 문 안 지역을 합친 형태로 처음에 경성부가 설치됩니다. 그러다가 이게 일제강점기가 어느 정도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그리고 식민지 도시 지역에 대한 개발과 인구 집중이 이루어지면서 1930년대 가게 되면 경성부가 크게 확장됩니다.
서울의 시가지 팽창
36년에 경성시가지 계획이 시행되면서 이전에 비해서 약 3. 5배? 이렇게 시가지가 팽창되는데요. 거기에는 서쪽으로는 신촌 지역, 동쪽으로는 청량리 지역, 남쪽으로는 영등포 지역이 포함돼 있는 굉장히 넓은 지역이 이루어지고요. 그래서 여기는 그 당시에 일본제국에서 도쿄를 필두로 해서 오사카, 교토, 이렇게 이어지는 도시 순위에서 그 당시 경성부의 도시 인구가 한 7대 도시에 들었다고 하죠. 그러나 인구 규모로는 그렇지만 사실은 그 청량리나 신촌 역은 주로 조선인들, 농촌에서 막 올라온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제대로 된 도시 인프라가 갖춰진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꽤 큰 도시였지만 사실 내적으로 들여다보면 굉장히 문제가 많은 도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식민지적인 도시화가 낳은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우리가 그러다가 해방 이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해방 이후에도 48년 정부 수립 이후에 바로 전쟁이 50년에 일어나고, 전쟁 이후에 여러 가지로 우리나라가 어수선한 상황이라서 사실 제대로 된 도시를 정비하고 이럴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 본격적인 의미에서 서울이 여러 가지 도시 개발 정비 이런 것을 하게 되는 것은 60년대부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60년대 서울의 역사와 이후 팽창
60년 4. 19가 일어나고, 또 그 이듬해에 5. 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러고 나서 바로 2년 뒤인 63년도에 서울의 시가지가 엄청난 규모로 행정구역이 팽창되거든요. 이것은 일종의 박정희 정권이 서울을 굉장히 중심 도시로 키우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어쨌든 그 결과 이미 63년부터 거의 오늘날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범위가 거의 서울시에 포함이 된 지역이 됩니다. 그런데 물론 이 시기는 아직까지 우리가 강남이라고 불리는 지역, 그 당시에 남서울 혹은 영동이라고 불렸던 지역은 거의 인구가 희박한, 완전 전원 풍경의 농촌 변두리 지역이었기 때문에 행정구역에만 포함되었다 할 뿐이지 아직 제대로 된 도시지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죠. 어쨌든 서울의 인구가 조선시대에는 성 안의 인구 10만 명으로 계획도시로 처음에 정도전이 계획했다고 하는데 이게 외곽까지 성저십리까지 포함해서 한 20만 이 정도 생각하는데, 나중에 조선 후기에 대해서 경상 상업을 비롯한 상업적인 발전, 도시의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대략 한성부 전체 인구가 35만 명 내외까지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개항을 맞이하게 되고, 일제 식민화를 경험하면서 다시 조금 줄어드는데요. 행정구역이 줄어들고 하면서 20만 명 남짓으로 줄어들었다가 다시 일제 시기 20년대, 30년대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도시 안정화가 되면서 36년에 이르게 되면 66만, 70만 가까이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게 되고, 45년 해방 시점에는 98만, 거의 100만. 그 당시 통계가 정확하지는 않으니까요. 100만을 넘었다고도 추정하는데 어쨌든 45년 시점에서는 100만 가까이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게 되고,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게 되죠. 그래서 60년대 후반 너머에 서게 되면 400만 돌파하게 되고, 70년대 500만 넘어서고, 80년대에 850만, 90년경에 이르면 인구 1000만 명에 육박하는 그런 형태의 급속한 인구성장 도시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20세기 서울의 인구 변동
전체적으로 서울의 20세기 도시 인구 변동은 한국전쟁 직후에 일시적인 인구 감소가 있는데요. 그걸 우리가 퇴행도시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때를 제외하고는 시종 인구 폭발이라고 할 만한 급증 추세를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아까 제가 식민지시기에 들어서의 변화까지 말씀드렸는데, 해방 이후에 30년대 일본 경성부가 확장된 이후에 일종의 청량리, 신촌, 영등포에 원래 4대 문 안에만 모든 것이 집중돼 있던 기능이 조금씩 분산되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그게 본격화되는 것이 60년대 이후에 서울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70년대 초에 이르게 되면 소위 3 핵도시 안이라는 발상이 나오는데요. 우리가 앞서서 다핵도시라는 개념을 배웠습니다만, 그런 개념을 적용해서 서울의 도심부. 4대 문 안 지역에 너무 모든 기능이 집중돼 있고 과밀화되어 있으니까 이걸 조금 분산하자는 차원에서 공업기능은 영등포로 옮기고, 영등포가 이미 일제시기부터 어느 정도 공업화가 이루어져 있는 지역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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