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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서울 역사, 세계 도시 이론

20세기 교통 네트워크 중심이었던 서울

20세기 교통 네트워크 중심이었던 서울

20세기 교통 네트워크 중심이었던 서울
20세기 교통 네트워크 중심이었던 서울

한강유역에 조선왕조의 도읍으로 1394년에 자리 잡은 한양, 오늘날의 서울이 어떻게 오늘날의 초거 대도시, 세계도시 서울로 변화했는가를 교통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앞서 서울이 한강이라는 수운을 이용해서 사통팔달의 한반도 전역에 다다를 수 있는 유리한 교통의 편의성이 아주 한양이라는 도시의 입지를 결정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우선 그 내용을 조금 더 상세히 말씀드리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양평, 양수리 지역 혹은 우리말로는 두물머리라는 지역이 사실 두 물길이 만나는 지역을 의미하죠. 그래서 그게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역을 의미하는데, 우선 배를 타고 남한강 지역으로 쭉 거슬러 올라가면 한강이 처음 태백산에서 발원된다고 하는데, 태백산 검룡소인가요? 그런데 우리가 뱃길로 갈 수 있는 지역의 마지막 부분이 지금의 충주호에 해당하는 지역이죠. 그런데 거기서 잘 아시다시피 바로 소백산맥 문경새재를 만나게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 교통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영남에서부터 북상해 올라올 때 조선 조정에서 전 관군을 결집해서 파견한 것이 신립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조령 문경새재에서 일본군을 막으려고 하다가 신립 장군이 워낙 기마 용병술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문경새재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내려와서 충주호에서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멸적인 타격을 입고 그때부터 조선의 관군이 완전히 괴멸되었다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얘기를 하죠. 문경새재, 조령관문이라는 게 지금도 그 흔적이 3개의 관문이 남아 있습니다만, 그게 한 10만 명의 병력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전략적인 요새지인데 사실 그걸 포기하고 내려온 것은 정말로 전략적으로 잘못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 정권 때 경부운하 얘기할 때도 충주에서 영남으로 넘어가는 관문을 뚫으면 낙동강으로 연결되어서 대구, 부산을 이어 남해안까지 가는 뱃길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는데요.

뱃길이 좋았던 서울

주로 영남지역의 물산이나 사람들이 이동을 하는 경로가 조령을 넘어와서 충주 쪽에서 배를 타면 서울까지 뱃길로 아주 쉽게 올 수 있었다는 것을 그걸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고요. 그다음에 북한강을 따라서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은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게 돼서 우리가 그 뱃길을 끝까지 갈 수 없고, 또 중간중간에 댐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뱃길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과거에 80년대에 평화의 댐을 짓기 위해서 성금을 모금한 일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금강산댐을 만드는데, 금강산댐에서 물을 방류하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는 둥 완전히 80년대 5공 정권 때 일종의 거짓말로 국민들을 농락한 사건인데요. 그게 결국은 말하자면 북한의 금강산 일대에서 발원한 물이 한강까지 이르게 된다는 걸 어쨌든 의미하는 거거든요. 실제로 조선시대나 개항기 때 사람들이 여행한 경로를 보면, 서울에서 금강산을 갈 때 뱃길을 타고 올라가서 금강산 입구에서 내려 거기서부터 가마를 타고 금강산을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교통의 중심지였던 서울

물론 나중에는 금강산 관광용 철도가 놓이게 되고 경원선이 만들어지고요. 원산에 명사 심이라고 아주 훌륭한 해수욕장이 있죠. 그러면서 그 뱃길은 별로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만, 전통시대에는 뱃길로 금강산까지 갔었다는 걸 알 수 있죠. 거기서 바로 동해안으로 통하게 되는 거니까요. 그런 점에서 북한강, 남한강 물길이라는 게 결국 서해와 동해를 잇는 혹은 영남을 잇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뱃길이었다는 걸 알 수 있고요. 또 두 말할 나위 없이 지금 한강 나가는 길이 북쪽으로 올라가서 북한 유역으로 걸쳐 있기 때문에 그 뱃길이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만, 강화도 앞으로 해서 나가는 길을 취하게 되면 거기서부터 평안도 쪽 북한으로도 길이 통하고, 남쪽으로는 당연히 전라도 지역의 호남 곡창지역과 뱃길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영산강이나 섬진강이나 남해안 뱃길이 다 연결이 되니까 농수산물이 다 서울로 뱃길을 통해서 올 수 있는 루트가 확보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한강이 가졌던 수운의 중요성이 있고요.

천대받았던 상인에 대한 서울의 모습 반영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했기 때문에 상업적인 부를 축적하는 것을 굉장히 경시했죠. 상인들이 굉장히 천대받았습니다. 제조업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제조업 발전은 정말 원시적인 수준에 그쳤는데요. 그랬지만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 조선도 일부 지역들, 특히 평안도 지역들을 중심으로 해서 상업이 상당히 발전되고, 그게 서울에도 굉장히 상업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경제적인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굉장히 상업이 흥행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한강을 중심으로 한 교역이 발전하게 되죠. 소위 경강 상업의 발전을 흔히 얘기하는데요. 그러면서 서울의 인구가 처음에는 성 내에 대략 10만, 성 외 지역까지 다 합쳐서 20만이었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면 대략 35만 명까지도 인구가 늘어났다고 얘기하는데요. 대부분 성 바깥에 경강 상업 이경 강 상업이 발전하면서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성조 10리 지역에 굉장히 많은 인구가 늘어났다고 얘기하죠. 그래서 조선 초기에는 소위 삼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동호, 한강, 서강 이렇게 세 군데의 나루터가 있고, 그 포구를 중심으로 해서 일정한 교역이 이루어지는 지역들이 있었는데요. 이게 후기에 이르게 되면 마포, 용산이 더해져서 오강이 되었다가 조선 말기가 되면 송파, 뚝섬, 양화까지 늘어나서 경강 상업이 성행하는 곳이 팔 강으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얘기하거든요. 이런 것들이 한강을 중심으로 해서 교역이 얼마나 점차적으로 성행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뱃길이 나루터들인데, 오늘날 한강에 만들어져 있는 다리가 31개가 있는데요. 이 31개의 다리들 중에 상당수는 조선시대에 이미 만들어진 나루터에 이 다리가 지금 놓여 있다고 보실 수 있습니다. 처음 만들어진 뱃길이 있으면 뱃길에서부터 육로로 들어가는 길들이 조선시대부터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